出版社: 랜덤하우스코리아
副标题: 5공, 6공, 3김 시대의 정치 비사
出版年: 2005-8-10
页数: 502
定价: 15,000원
ISBN: 9788959247387
内容简介 · · · · · ·
1980년 제5공화국부터 제6공화국, YS정부, DJ 정부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에 걸쳐 대통령 정무 비서관, 정책보좌관,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3선 국회의원 역임. 남북 비밀회담 수석대표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측 요인과 회담, 3당 통합 및 DJP 연합과 정권교체의 주역.
'6공의 황태자'라 불렸을 정도로 정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던 박철언 전 의원이 쓴 정치 회고록. 당시에 기록해 두었던 20여 권의 업무 다이어리와 120여 권의 수첩, 방대한 사진 등을 자료 등을 바탕으로 한국 정치사의 감춰진 진실들을 이야기한다.
1,2 부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제5공화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 기술했으며, 3,4,5 부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제6공화국을 기록했다. ...
1980년 제5공화국부터 제6공화국, YS정부, DJ 정부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에 걸쳐 대통령 정무 비서관, 정책보좌관,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3선 국회의원 역임. 남북 비밀회담 수석대표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측 요인과 회담, 3당 통합 및 DJP 연합과 정권교체의 주역.
'6공의 황태자'라 불렸을 정도로 정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던 박철언 전 의원이 쓴 정치 회고록. 당시에 기록해 두었던 20여 권의 업무 다이어리와 120여 권의 수첩, 방대한 사진 등을 자료 등을 바탕으로 한국 정치사의 감춰진 진실들을 이야기한다.
1,2 부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제5공화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 기술했으며, 3,4,5 부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제6공화국을 기록했다. 6부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부터 1997년 DJP 연합을 통한 정권 교체에 이르는 시기,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기록했다.
이번 회고록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42차례 남북비밀회담 수석대표(1985년 ~ 1991년)로 김일성 수석 등 북측 요인과의 회동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추친과 좌절의 전모
- 1987년 6.29 민주화선언의 진실 : 전 대통령이 먼저 제의
- 5공 청산을 둘러싼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양 측의 격렬한 공바 :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와의 각 3시간 단독대담과 5공 핵심의 정치자금 설명
- DJP 야권 후보단일화를 향한 집념과 성사 비화
- DJP 공동 집권 후 통합신당창당 시도와 DJ, JP 와 결별의 내막
作者简介 · · · · · ·
시인, 변호사, 법학박사, 검사장, 대통령 정책보좌관,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 13, 14, 15대 국회의원,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순수문학 시 부문 등단, 서포문학상(대상), 순수문학 작가상
2011년 현 한반도 복지통일연구소 이사장, 사단법인 대구경북발전포럼 이사장
저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는 창조할 수 없다>, <4077 면회 왔습니다>,
<옥중에서 토해내는 한>(일본어판), <작은 등불 하나>,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1권ㆍ2권.
目录 · · · · · ·
서문
프롤로그 - 무대를 떠나며
이제 무대를 떠나려 합니다 | 치열하게 사시다 불현듯 떠나신 아버지 | 어머니,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찡해오고
제1부 제5공화국 전반기 1980∼1985년 청와대 비서관 시절
01 새 공화국 준비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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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프롤로그 - 무대를 떠나며
이제 무대를 떠나려 합니다 | 치열하게 사시다 불현듯 떠나신 아버지 | 어머니,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찡해오고
제1부 제5공화국 전반기 1980∼1985년 청와대 비서관 시절
01 새 공화국 준비 1980년
국보위로 파견 근무 명을 받다 | 노태우 중위와 나 | 유신헌법을 대체할 헌법 개정 작업 | 대통령 임기의 갑작스런 변경 | 막강한 허화평 보좌관과 법제연구반 구성 | 강재섭 검사를 청와대로 발탁
02 제5공화국 출발 1981년
새세대육영회와 이순자 영부인 | 허화평 보좌관과 첫 갈등-계엄 해제 시기 | 김경원 비서실장의 결재 ‘보았음’ | 대통령의 미국 방문 수행 | 워싱턴 프레스클럽에서의 해프닝 | 통일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하다 | 출마 예정자 당선 가능성을 극비 검토하라 | 백인엽을 구속하라 | 허화평과의 두 번째 갈등-법무장관 임명 | 스리 허許의 이종원 검사장 뒷조사 | 대법원장 후보들을 면접하다 | 이회창을 대법원 판사로 | 노 장관의 비서관으로 이병기를 천거 | 윤보선, 김영삼, 김종필, 이철승, 정일권, 이후락의 자세 | 판을 다시 갈아엎더라도 세대 교체를 | 서울올림픽 유치로 주춤해진 강성 흐름 | 저질탄 사건의 전말 | 현대중공업 처리를 위한 특별 지시 | 전두환 대통령의 용인술
03 격동의 1982년
방송계 비리 조사와 경고 | 체육부의 신설 작업 | 김진선 대령을 차출하려다 꾸중 들은 노 장관 | 부산 미국문화원 사건 | 용공 종교 세력은 용납할 수 없다 | 박근혜 양의 건의로 김계원 실장 석방 조치 | 종교문제대책반을 담당하다 | 허화평 수석과 세 번째 갈등-이철희·장영자 사건 | 벌거벗은 임금님의 분노 | 납덩이 같은 청와대 서재 회의 | 성역 없는 수사를 강력히 주장 | 이규광 소환의 불가피성을 강조 | 각하! 용단을 내려야 합니다 | 이종원 법무장관과 정치근 검찰총장의 갈등 | 미진한 부분은 보안사에서 엄히 조사하라 | 수사 검사들의 무제한 TV 생방송 기자회견 | 김기춘 검사장과 나 | 반체제 종교 대책 슬라이드 시사회 | 사시司試 합격 정원의 대폭 증원과 아이로니컬한 드라마 | 허화평·허삼수 수석의 전격 경질 | 수석 회의 고정 멤버로
04 새로운 출발 1983년
집사람 갖다줘(500만원) | 과잉 충성한 법률가는 민주 헌정사의 죄인 | 4·19 학내 행사 중단은 안 됩니다 | 박 대통령에 대한 라이벌 의식 | 오송희 사건과 유태흥 대법원장과 이보환 부장판사 | 세 번 얻어먹으면 한 번은 밥을 사라 | 나의 대통령 보좌 방식 | 법 제도와 시설 개선을 위한 노력 | KAL기 격추 사건과 소련 규탄의 자제 지시 |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 | 대통령 유고시의 북한의 전략 | 역대 정보부장에 대한 대통령의 평가
05 자신감에 찬 국가 운영 1984년
일본 방송 못 보게 하라 | 조승혁, 강만길, 이영희의 구속과 석방 그리고 취업 주선 | DJ에 대한 극렬 비판 | 청소년종합대책 수립을 지시받다 | LA올림픽 10위와 의기양양한 대통령 | 북한의 수재 지원을 받아들이다 | 민정당 난입 학생 처리에 관한 청와대 논쟁 | 전직 대통령의 예우·경호·형사 면책 방안을 입법하라
06 1985년 2·12총선 전후의 바람들
장세동 경호실장과의 국정 현안 논의 | 노 대표에 대한 경고 | 전 대통령과 전경환과 나 | 청와대를 떠나 안기부로 | 안기부로 떠나보내는 전 대통령의 당부 | 후계 구도에 대한 탐문
제2부 제5공화국 후반기 1985∼1988년 안기부장 특보 시절
07 혼란스러운 1985년 봄
영전인가 좌천인가 | 중국 해군 어뢰정 사건 | 청와대 법제연구반을 안기부장 특보실로 | 대북 문제는 안기부 중심으로 | 안기부 핵심 간부 회의 |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 처리를 둘러싼 갈등 | 학원안정법 파동의 진상 | 파동의 주역은 허문도인가 | 보안 목표에 대한 공격시 총살하라 | 법안에 대한 대통령의 구체적 지시 | 모양 좋은 후퇴
08 정상 회담 추진을 위한 남북 비밀 회담
남북 비밀 회담의 수석 대표로 | 장세동 부장, 전두환 정권의 2인자로 | 장세동 부장과 나 | ‘88계획’의 추진 | 정상 회담은 언제 어디서든 좋다 | 한시해 북한 수석 대표와의 첫 비밀 회담 |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 | 남과 북의 시각 차이 | 북측은 내 수완에 당황하고 있는 거야 | 비밀 회담 전략을 위한 수뇌부 대책 회의 | 남북 2차 비밀 회담과 특사 교환 방문 합의 | 남북 고향방문단의 첫 합의 | 아웅산 사건의 사과 문제 | 만년필 모양의 호신용 무기를 준비하라 | 노신영, 이원경, 이규호, 허문도의 부정적 시각
09 북한 특사의 서울 방문 전모
그런 불행한 일이 없도록 서로 노력하자 | 김정일 동지는 절대 강경하지 않다 | 김일성 주석의 친서 | 김 주석의 친서에 대한 전 대통령의 대답 | 허담 특사가 부하 시키지 않으면 신변 위험 없다 | 아웅산 사건 때 보복 전쟁 주장 있었다 | 삼청각에서의 남북 비밀 만찬 | 허담·한시해의 서울 비밀 방문 결산
10 분단의 벽을 넘어 평양으로
첫 번째 평양 비밀 출장 준비 | 국회 회담은 끊어버리라 | 특수지역출장허가서 | 이데올로기에 대한 광신의 시대는 지났다-통일의 길로 출발해야 한다 | 돌아오지 않으면 책상 서랍을 열어 보라 | 평양행 특별 열차에서의 슬픈 상념 | 모란봉 초대소의 4자 회동 | 전 대통령의 친서 내용 | 술 취하지 않는 약을 먹었으나 | 김일성, 김정일, 허담, 한시해에 대한 선물 | 영용한 인민군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 김일성 주석과의 대화 | 김일성 주석의 통일관 | 통일된 중립국가는 군대 20만 명으로 충분 | 과거는 다 백지로 덮고 서로 상봉하자 | 김일성 주석과의 오찬 | 북측의 불가침 선언 문안과 평화통일공동강령안 | 교예단원의 추락과 북측의 선물 | 북측, 정상 회담 조기 개최로 선회
11 역풍逆風과 반전反轉을 위한 시도
싸늘하게 변해버린 서울의 분위기 | 이제는 정상 회담 성사 노력을 하지 마라 | 한 점 부끄럼 없는 ‘분단극복사’를 쓰고자 | 끈질긴 비밀 접촉 창구의 운영 |‘88계획’ 관계 한미 협의회 | 설날 특사 자격으로 두 번째 평양 비밀 출장 | 평양 가는 나에 대한 전 대통령의 당부 | 머나먼 장정의 향도로서 | 분위기 반전을 위한 새로운 시도
12 위기의 1986년
불붙은 개헌서명운동 | 김용식 전 외무장관의 자문 | 전 대통령의 내각제 개헌 준비 지시 | 7월 7일 당·정·청 핵심 참모 회의 | 청와대 술자리와 대통령의 방담 | 민정당이 20년은 집권해야 | 부천서 성고문 사건 | 전 대통령의 내각제 집념 | 노 대표 행사에 봉황 병풍 자제하라 | 대통령의 엄청난 지시-친위 쿠데타(?) | 중앙청 앞에는 탱크를 하루만 배치하라 전 대통령의 고단수 심리전 이춘구, 김태호, 고건과의 안가 모임 | 혁명적 방법의 정권 재창출-‘비상선진계획’ | 청운동 안가의 공안 장관 회의 | 전 대통령의 초헌법적 비상조치 지침 | 김영삼·김종필의 외국 도망을 막아라 | 김대중의 대통령 선거 불출마 선언 | 건국대 사태-1288명 구속 | 청운동 안가의 당정 회의 | 김종호 장관의 강경론 | 국회법·형사소송법 개정 논의 | 전 대통령과의 열띤 논쟁 | 이민우 총재 구상의 여파
13 벼랑 끝에 선 1987년
장세동 부장의 이해구 차장에 대한 지시 | 전 대통령과 노 대표와 장세동과 나 | 전두환, 노태우, 장세동의 청와대 회동 | 장세동의 노신영, 이종찬, 남재희, 권정달에 대한 경계 | 4·13호헌조치 | 정보 공해와 차지철, 김재춘, 김재규 | 임기 말의 권력자의 심경 | 박종철 군 사건의 정직한 처리를 강력 주장 |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 서동권 총장의 진실 보고와 노신영, 장세동의 퇴장
14 6·29민주화 선언의 진실
이제야 ‘6·29선언’의 진상을 밝힌다 | 6월 17일 노 후보 중심으로 시국 수습 방안을 | 내각제에 대한 미련 | 전 대통령이 먼저 직선제 제의했다 | 6·29선언문의 작성 과정 | 6·29특별선언문 | 7년 가뭄 끝 소나기의 시원함 | 누가 진정한 ‘6·29선언’의 주역인가
15 월계수회와 12·16대통령 선거
멀고 먼 대선 승리의 길 | 꿈도 아픔도 국민과 함께 | 노태우 스쿨 | 사조직과 강재섭과 나 | 30만 명 동원과 동지들에 대한 감사 | 전두환 대통령의 선거 독려 | 안무혁 부장의 이종찬, 권정달에 대한 경고 | 이전에 직선제 이야기하면 야단쳤다 | 중국과의 비밀 접촉 | 월계수 교육 | 남을 설득하려면 스스로 먼저 미쳐라 | 전국의 월계수 거점을 현장 확인하며
16 보통 사람의 시대를 열며
이춘구, 현홍주, 이병기의 일등공신 보도 | 12·26 당선 축하 월계수 모임의 노 당선자 내외 | 취임준비위원회와 최병렬, 현홍주, 이병기의 신실세 등장 | 대對공산권 관련 조직 기능을 강화하라 | 북측 한시해의 축하 인사 | 6공의 첫 인사 작업 | 법사수석 박철언에 대한 전 대통령의 거부 | 7년 노심초사한 드라마를 보면서
제3부 제6공화국 전반기 1988∼1990년 민자당 출범
17 4·26총선과 여소야대 정국
퇴임 첫날의 전 전前 대통령 | 형님! 꼭 정치 해보고 싶습니다 | 취임준비위원회 멤버들의 치열한 견제 | 88남북 핫라인과 기밀실 | 5공과의 단절론 기류 | 너무 많이 당선될까 걱정이야! | 13대 민정당 전국구 의원 후보 결정 과정 | 박철언이 다 했다는 오해의 진상 | 김우중 대우 회장과 나 | 자칫하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 자네가 다시 큰 역할을·311 | 패배 후의 첫 청와대 모임 | 북방정책연구소를 열다
18 5공 청산과 전 전前 대통령의 백담사행
5공을 향한 칼바람 | 이순자 여사의 두 시간여 하소연 | 이순자 여사와 김옥숙 영부인 | 전 대통령이 노 대표를 후계시킨 이유 | 직선제는 내가 설득, DJ 사면은 노 대표 주장 |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죽여라 | 전 전 대통령의 노 대통령에 대한 선전포고 | 박철언이 그럴 수 있나 | 전 전 대통령의 흉금 토로 세 시간 | 상호 연락에 박철언을 쓰십시다 | 최병렬은 안 된다 | 허문도·민정기는 폭탄선언 준비 | 이양우 변호사와의 면담 | 이순자 여사가 폭탄선언문 2차 독회 | 전임은 권력과 힘으로 통치, 나는 지혜를 모아 더불어 정치 | 나중에 만날 때 술이나 한잔 주시오 | 대통령 내외와 우리 부부의 만찬 | 장세동, 안현태, 이양우의 ‘5공 정치자금’ 설명 | 전 전 대통령의 백담사행과 노 대통령의 눈물 | 6공의 첫 개각-극비로 자료 준비 지시 | 윤길중 대표의 정호용, 김복동, 최병렬에 대한 평가 | 노 대통령, 홍성철·최병렬·나와 개각 인선 논의 | 장세동·이학봉의 구속과 허문도의 구제
19 정계 개편을 위한 물밑 대화
보·혁 구도로의 정계 개편 | YS와의 두 시간 비밀 회동 | 노무현 의원을 크게 야단쳤습니다 | YS, 북방 정책에 대한 미국 우려 전달 | 유혁인 대사와 YS와 나 | DJ 비밀 접촉시 고려할 사항 | DJ와의 심야 세 시간 비밀 회동 | DJ, 김원기 총무를 비밀 창구로 지정
20 중간 평가中間評價의 유보
잘못된 공약, 중간 평가 | 중간 평가 공약은 자만에 대한 채찍질 | 손주환 의원의 이종찬 총장에 대한 문제 제기 | 이종찬 총장의 헛스윙| 이종찬에 대한 노 대통령의 최후 경고 | 애매한 사과 | 김원기 총무, DJ는 중간 평가 불용론 | 김영삼은 거국 내각의 총리 받을 용의 | 백담사 측의 중간 평가 결행 촉구 | 월계수에 총동원령 | 야 3당 총재 회담 | 차기 대권 원하면 YS는 입당해야 | JP와 회동시 대통령 유의 사항 건의 | 삼청동 안가의 고위 당정 조찬 회의 | DJ와 회동시 대통령 기본 입장 건의| DJ, 신임 내건 국민투표는 위헌이다 | 박태준·박세직의 1500억 원 모금 시도 | 신임 연계 중간 평가 안 된다 | 대통령과 박준규, 이종찬, 김윤환, 홍성철, 노재봉, 최창윤과 나 | 양동작전을 펴다 | 월계수 핵심 간부 수련대회 | 김덕룡과 유혁인과 나 | 홍성철 비서실장과 황병태와 나 | 홍성철-신격호 롯데 회장-YS와 나 | 중간 평가 안 하는 것도 빛나는 결단 | YS와 합당 및 중간 평가 유보의 원칙 합의| 중간 평가 필요 없다 | 드디어 노 대통령 말문을 열다 | 제일 좋은 것은 부전승이다 | 발표 전야의 청와대 당정 회의 | 3·20무기 연기 결단 발표
21 정계 개편 추진과 공안 정국
중간 평가 연기는 큰 작품이었다 | 5공 청산의 뜨거운 감자, 정호용·이원조| 예기치 못했던 복병, 공안 정국 | YS, 동교동과는 절대로 연합하지 않는다 | 황병태의 DJ에 대한 구체적 제보 | 보수 세력의 반격 | YS는 중국 가려다 소련으로 바꾸었다 | 김덕룡, 서석재 구명 요청 | 이원조에 대한 배신감 | YS, 방소訪蘇시 노 대통령 친서 휴대 요망 | 황병태·김덕룡-홍성철·박철언의 비밀 회동 | YS 면담시의 노 대통령 지침 | 김현철 집에서 YS와의 비밀 회동 | YS 방미를 위해 박준규 대표 일정 수정 | YS, 서석재 그 사람 고생 많이 하고 있다 | 『월간조선』, 세계일보의 보도-노 대통령의 분노 | 주먹을 내밀고 나면 이미 주먹이 아니다 | 모욕을 받고 어떻게 대통령을 계속할 수 있나? | 엄삼탁의 박세직에 대한 비판 | 황병태, YS 방소訪蘇시의 가이드라인 문의 | 김영삼 총재에게 20억 원+α전달 | 고르바초프·부시에게 보내는 대통령 친서 YS에게 전달 | 전 전前 대통령의 서운함 | 김덕룡의 엉뚱한 제안 | 색깔의 덫에 걸린 DJ
22 정무장관으로 정계 개편 본격 추진
정무장관 임명과 염돈재, 이종백, 강근택, 박원출, 정권 | 합당을 서두르는 YS | YS의 DJ 두들기기 | DJ 구속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 이종찬 총장의 낙마落馬 | 박용만 의원의 야권 통합 추진 | YS의 대통령 탄핵소추 발언 해프닝 | 박재규 의원 수뢰 혐의 보도와 YS의 반발 | YS·JP 중에 기회를 주고 그 다음은 순수 민간인이다
23 정계 개편의 마지막 걸림돌, 정호용·이원조
어긋나기만 하는 노 대통령과 DJ | YS, 노무현은 당을 떠나도 무방합니다 | 노 대통령의 탄식과 강영훈 총리의 눈물 | 제2의 6·29선언을 준비하라 | 정호용 의원의 결단을 촉구하다 | 스위스 부르니 언덕에서 정국 구상 | 정호용 문제 해결에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다 | 정호용의 최후 반격 | 정호용 의원과의 대담 | 노 대통령의 최후 통첩 | YS의 마지막 간청 | 서동권과 정호용의 격렬 담판 | 노 대통령의 애정 어린 충고 | YS, 드디어 꼬리를 내리다 | 4당 총재, 과거 마무리 완전 합의
24 3당 합당을 향한 카운트다운
민주당과 구체적 합당 시나리오 협의 | DJ 포용을 마지막까지 대통령에게 건의 | 김영삼 총재에게 연말 성의 10억 원 전달 | 신당의 지도 체제를 두고 민주당과 줄다리기 | 전 전 대통령의 증언과 노무현 의원 | YS의 신당 공동대표에 대한 집착 | DJ 통합 참여의 마지막 설득 |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의 회동 |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의 회동 | 내각제 합의 각서에 서명하다 | 합당 비밀 각서 | 공화당과도 합의 각서 서명 | YS에게 3당 합당 통고 | 평민당은 입장 차이로 우선 빠진 것이다 | 3당 합당과 통합추진위원회 | YS에게 설 연휴 앞두고 10억 원 전달 | 허화평 전 수석의 부탁 | 서동권 안기부장과 이현우 경호실장의 옥신각신 | YS, 매주 수요일 밤에 정기 회동을 하자 | 말이 달라지는 YS | 김영수 안기부장 특보와 나
2권
제4부 대북 포용 정책과 북방 정책 1988∼1992년
25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6공 대북 특사
새로운 통일 정책을 위한 진통 | 깜짝쇼는 안 됩니다 | 삼청동 안가의 통일 정책 대책 회의 | 36차 남북 비밀 회담 | 북방 정책에 미국의 오해가 | 정주영 회장의 적극적 기여 | 6개국 동북아평화협의회의 제안 | 37차 남북 비밀 회담 | 정종욱, 김덕, 한승주, 이기택, 정용석 등과 청송靑松 사업 | 이홍구 장관과의 논쟁 | 6공 특사로서 첫 평양 비밀 출장 | 서재골 초대소 | 허담과의 평양 회담 | 노 대통령 친서에 대한 북측의 반응 | 6공 대북 정책에 대한 치열한 탐문 | 공작선 침투 문제의 솔직한 시인 | 김일성 주석의 약속 | 안기부가 박 보좌관 팀을 적극 뒷받침하라 | 정주영의 평양·소련 방문 | 북방 외교는 외무부가 주도할 수 없다
26 끝없는 견제와 아쉬움
노재봉 특보의 북방 정책 속도 조절 주장 | 정주영의 북한 방문과 나의 측면 지원 약속 | 이상훈 장관, 최세창 의장, 이종구 총장의 걱정 | 고르바초프의 아르메니아 대지진 위문품에 대한 감사 | 김수환 추기경의 방북 문제 | 싱가포르 남북 비밀 회담 | 특사 교환 방문 합의 | 정주영의 금강산 관광·개발 합의와 엄청난 태풍 | 비밀 외교,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 다시 무산된 정상 회담 분위기 | 우울한 출장-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CIA 초청 방문 | 평양축전 참관과 비밀 회담, 오 백두여! | 박철언 방북설 공방 | 한묘숙이라는 정체불명의 여인 |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발표 | 이종찬, 박준규, 김복동의 방북 초청 요망설 | 북방 정책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는 노력| 대통령, 북방 정책은 시의적절 | 문명자 기자와 김일성 주석 | 서동권 안기부장의 북한 방문 | 42차례 남북 비밀 회담의 백서 세 권
27 헝가리와 수교 협상―‘푸른 다뉴브 강’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향하여 | 북방 정책의 추진 주체는 ‘박철언 팀’| 벅찬 도전, 위험한 모험 | 7·7특별선언의 팀장으로 | 협상단장을 서로 맡지 않으려 | 엄청난 경협 차관을 요구 | 바르타 총재와의 대담 | 부다페스트의 새벽 | 그로스 서기장 겸 수상 면담을 요청 | 보따리 싸가지고 돌아가겠다 | 마르요이 부수상과의 끈질긴 담판 | 그로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 겸 수상과의 역사적 만남 | 바르타 특사와의 피 말리는 줄다리기 | 노 대통령의 바르타 특사 면담 | 비망록으로 상주 대표부의 교환 설치 합의 | 한·헝가리 체육 협정 의정서 조인 | 한국과 헝가리의 외교 관계 수립 | 북한의 헝가리에 대한 무례한 욕설 | 대통령의 국빈 방문에 앞서 헝가리 방문 | 임시 대통령, 외무장관, 바르타 총재와 면담 |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과의 만남
28 소련과의 수교 협상
핵심적 과제 | 첫 번째 모스크바 비밀 방문 | 카피차 동양학연구소장과의 대담 | 모스크바의 아리랑 | 이바노프 경제위원회 부위원장과의 대담 | 밤새 배탈로 고생했던 레스토랑 | 우즈벡 공화국의 카티로프 의장과의 대담| 김일성 배지를 단 네 사람 | 미국·캐나다연구소 알바토프 소장과의 깊은 대담 | 친서와 박 보좌관의 방문·설명은 결정적 역할 | 소련 외무성 회담과 친서 전달 | 성대한 감사 만찬회와 하만경 교수, 김성찬 사장 | 비밀 접촉 창구-노보스티 도쿄 지국장 두나예프 | 극동문제연구소장 티타렌코와의 대담 | 노 대통령의 게오르기 김 면담과 친서 전달 | 그라스노야르스크 연설도 함께 토의한 결과 | DJ 소련 방문에 부정적 입장| 박동진 주미 대사와의 시각 차이 | 소련의 불평-한국은 막상 되는 일이 없다 | 알바토프 박사 일행을 위한 만찬| 일본에 앞서 시베리아 진출해야 | 정주영과 김종인을 연결해주다| 일본 가이후 수상과의 면담 | 2차 모스크바 방문 | 브루텐스와 1차 비밀 회담-대통령 친서 전달 | 브루텐스와 2차 비밀 회담-고르비의 긍정적 답변 | 브루텐스와 3차 비밀 회담-상호 연락 위한 3라인 합의 | 정상 회담을 성사시켜달라는 김종휘의 간청 | 두나예프와 나 | 샌프란시스코 정상 회담의 숨은 이야기 | 조기 수교를 위해 ‘옐친’ 카드를 이용 | 브루텐스와의 재회 | 카피차 소장, 로그노프 총장, 야코블레프 대통령위원회 위원과의 회동 | 러시아 공화국 슈라에프 총리 등 핵심 인사들과의 연쇄 회동 | 레닌그라드 야간열차에서의 간이 세미나 | 주효한 옐친 카드 | 블라디보스토크 아·태회의에 참석 | 세바르드나제 외상과의 대화 | 루킨 외무위원장·쿠즈니소프 주지사와의 회동 | 루킨 외무위원장의 한국 방문 | 노 대통령의 소련 국빈 방문을 둘러싼 비화들
29 중국과의 수교 협상
죽竹의 장막을 두드리다 | 리루이환·천시퉁·장바이파와의 만남 | 안재형·자오즈민·현정화 그리고 나 | 중국국제우호촉진협회 진리金黎 부회장과 회담 | 우후죽순으로 난립하는 중국과의 접촉 | 베이징 공항에서의 박철언 실종 사건 | 북한 이종옥 부주석과의 만남 | 진리, 악풍 부회장과의 회담-이순석과 장치혁 | 중국 요인들을 위한 리셉션 개최 | 베이징 대학에서의 특별 강연 | 무역대표부 교환 설치 원칙적 합의 | 중국 최고 지도부에 장문의 편지를 보내다 | 덩샤오핑에게 보낸 26쪽 비밀 편 | 서동권 안기부장의 방해 공작 | 첸지천 외교부장과의 대담 | 첸지천과 13년 만의 재회再會
30 베트남, 라오스와의 수교 노력
남방 공산국가와의 수교 추진 | 베트남 방문 | 구엔 칸 부수상과의 담판 | 라오스 방문
제5부 제6공화국 후반기 1990∼1993년
31 YS와의 갈등
김윤환·이원조와의 틈새 | YS, 박 장관 소련에 꼭 같이 갑시다 | 소련 방문은 4∼5월이 바람직 | YS와 첫 번째 충돌 | 이건희 삼성 회장과 나 | 동행이냐, 수행이냐? | YS와 두 번째 충돌-박 장관, 내각제 없던 일로 합시다 | YS 견제는 박태준·김윤환·박준병을 활용하라 | 노재봉·이홍구와 나 | 4·3보궐 선거 대책 회의 | YS와 함께 모스크바 방문 | YS와 세 번째 충돌-대통령 친서 파문 | YS-고르바초프 회담의 진상 | 고르바초프의 답신 메모를 둘러싼 오해 | YS 측의 대공세 | YS의 뒤집기-막말과 깽판 | YS와의 막판 대결-결국 내가 총대를 메다 | YS의 박철언 죽이기 | 장관직 사퇴와 대통령의 위로
32 2차 정계 개편 추진
내각제를 위한 집요한 노력 | 김원기 총무와의 만남 | 노 대통령과의 청남대 골프 | 제2정계 개편 구상 | 박상천과의 만남 | 김대중 총재와의 비밀 회동 | 신격호 롯데 회장, YS와의 화해를 종용·267 | 대통령의 당부 | 내각제 각서 유출 파동 | 차라리 평민당과 공동 집권합시다 | 유종하 외무차관의 하소연 | 일본 여당 핵심들과의 만남
33 체육청소년부 장관―열정, 보람 그리고 괴로움
체육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 | 국민생활체육협의회에 대한 공격 | 2002월드컵대회를 유치하기로 | 지는 해와 떠오르는 태양 | 대통령·김복동·금진호·박철언의 네 시간 만찬 | 남북 단일 탁구·축구팀의 구성과 개가 | 체코와 체육 교류 협정 | 청소년육성10개년계획의 수립 | 완전히 물 건너가버린 내각제 | 세계잼버리대회 개최 | 청소년기본법 제정-DJ의 협조
34 대통령 후보 경선
YS 후계 결정 주도, 민정계 5인방 | 14대 총선과 민자당의 과반수 획득 실패 | 민정계 후보 단일화를 위한 노력 | DJ와 정주영의 접근 | 노 대통령의 YS 대통령 만들기 | 박태준을 지원하지 마라, 외국으로 떠나라 | 최형우의 맹세 | 9시간 20분의 마라톤 회의-단일 후보 선출 | YS, 노 대통령에게 큰절 | YS와의 만남 | 박상천을 통한 DJ의 부탁 | YS 추대위원회의 발족 | 파국으로 치닫는 경선 | 노 대통령과의 정치적 결별 | 이종찬의 경선 거부 | 전당대회에는 꼭 참석하시오
35 국민후보 추대를 위한 노력
김옥숙 영부인과의 가슴 아픈 만남 | 정주영·박찬종의 러브 콜 | 노 대통령의 민자당 탈당 | YS와의 마지막 만남 | 박태준 최고위원에게 결단을 촉구 | 고심하는 박태준의 행보 | 내가 만든 민자당을 떠나 겨울 나무로 | 강재섭의 잔류 선언 기자회견 | 국민후보를 둘러싼 진통 | 박태준, 국민당과 통합을 권유 | 이종찬의 이중 플레이와 표류하는 국민후보 | 국민당에 입당
36 추악했던 선거와 정치 보복
정주영 변수 | 초원복국집 사건 | 대선 패배와 재기의 몸부림 | DJ의 훈수-방어적 공격이 중요| 혼비백산한 정주영 대표 | 정주영의 정계 은퇴 | 정치 보복의 시작과 천막 당사
제6부 문민정부·국민의 정부 1993∼2000년
37 YS 정부의 출범과 정치 보복
LP(Little Prince) 수사 | 번번이 빗나가는 화살 |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 | 슬롯머신 사건 | 아닌 밤중에 날벼락 | 1993년 5월 17일 아침 | 곽동헌 변호사와 나 | 기자간담회 | 이재원 전 차관의 건의 | 국회를 떠나며 | 마녀사냥 | 슬롯머신 사건의 핵심 | 덮어둔 엄청난 배후를 밝혀야
38 어처구니없는 재판과 482일 감옥살이
김동길 박사와 넥타이 | 새벽이 왔다면서 닭의 목은 왜 비트는가 | 신세 좀 지러 왔습니다 | 옷이 잘 어울리나? | 변호사들의 걱정 | 검찰의 수사 기록으로도 무죄無罪 | 검사가 찢어버린 정덕일의 자술서 | 웃지 못할 이야기들 | 32마디의 ‘예’와 돌연한 홍 여인의 출국 | 유수호 변호사의 법정 퇴장과 궐석 재판 | 김수환 추기경, 서의현 총무원장 스님, 김장환 목사 | DJ와 석방요구안 | 전두환·노태우 두 분 대통령의 위로 | 감옥의 국화꽃밭 | 감옥에서 제일 하고 싶은 일은 | 눈 내린 새벽 | 갑자기 바뀐 항소심 재판부 | 끝내 하지 못한 정덕진의 양심선언 | 피 맺힌 최후 진술 | 민들레꽃 | 커피 한 봉지, 오이 두 개와 뜨거운 눈물 10초 만에 끝난 대법원 판결
39 8·2보선의 승리, 석방 그리고 와신상담
예정된 보궐 선거 | 아내의 출마 가능성에 대한 걱정과 견제 | 아내 현경자 | 보궐 선거와 남북 정상 회담 | 60년 만의 불볕더위 | 8·2보궐 선거 후일담 | 전두환 대통령의 위로와 서운함 | 신민당의 내분 | 국회의원 현경자를 외조 | DJ 내외와의 저녁식사
40 1995년, 후後3김 시대의 부활
팽烹당하는 JP | TK 정서와 나라모임 | 감옥에서 시인이 되다 | 진통하는 나라모임 | 나라모임의 대표로 | 자민련 합류를 두고 고민 | JP와 3년 만의 만남 | 자민련에 합류하자마자 맞은 뒤통수 | 6·27지방 선거에서 이의익 후보를 지원 | 6·27지방 선거의 후폭풍
41 특별복권과 4·11총선
뜻밖의 특별복권 | 대구·경북 통합지부장 | 노 대통령을 옥중 면회 | 불어라 녹색 바람 | JP에게 당 쇄신을 강력히 요구 | 전두환·노태우 대통령과 정호용 의원을 면회 | 목요일의 암살暗殺 | 야권 후보 단일화의 화두를 던지다
42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한 노력
야권 후보 단일화를 통한 공동 집권 구상 | 대정부 질문-YS 정권의 실정 규탄 |‘우리문화역사기행’ | 미국에서 먼저 이룬 야권 후보 단일화 | 후보 단일화가 지지부진한 이유 | 극비 회동과 DJ의 맹세 | 후보 단일화를 위한 당내 분위기 조성 | 나는 고스톱을 못 친다 | 야권 공동 집권론
43 흔들리는 신한국당, 표류하는 후보 단일화
한보 정국-김현철의 몰락 | DJ, 다음에는 박 의원에게 | 노태우 대통령의 걱정 | JP 측을 강하게 압박 | 여론 조사로 후보를 결정하자 | 자민련 TK들의 합의 | JP와 담판 | 박태준의 부활 | 탈당 시사와 JP 측의 집중 포격 |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
44 DJT 연합과 15대 대선
천하삼합지계-DJT 구상 | 정권 교체와 내각제를 위한 국민대연합 구상 | 독자 출마를 권유받다 | 21세기 나라모임의 구상 | JP의 몽니 | 노 대통령의 부탁 | 이인제의 러브 콜 | DJ 비자금 사건 | 전격적인 DJP 합의 | DJP 합의문에 대한 문제 제기 | DJ에게 강력한 문제 제기 | 장수만세 무대의 기쁨조 될 수 없다 | 이회창·조순 측의 러브 콜 | 한 걸음 물러서는 JP와 박태준 | 마魔의 8%를 깨라 | 철옹성 같은 TK 정서
45 공동 정권의 출범과 운영 그리고 결별
당선자와의 만남 | 새로운 통일 정책의 구상 | 박한식 교수를 통한 북한과의 간접 대화 | 국정원 간부들과의 오찬 | 대통령, 대구시장 출마를 권유 | 묻지 마 싹쓸이 바람 | 김중권 비서실장과 나 |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우리 내외의 조찬 | 공동 여권 내의 파열음 | 동진 정책에 브레이크를 걸다 | 김윤환 의원과의 대화 | 시국 현안과 관련, 강력한 문제 제기 | JP의 연내 내각제 포기와 당내 반발 | 김대중 대통령과의 마지막 만남 | 자민련·국민회의의 합당 움직임 | 제3의 길을 모색 | DJT 세 사람이 결정하는 시대는 끝났다(대전환) | 국민회의와 결별을 선언 | 노무현 부총재와 불꽃 튀는 논쟁 | 아직도 나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다
에필로그
찰스 강과 평화와 고독 | 나는 결국 실패한 이상주의자인가? | 나의 사랑, 나의 가족 | 양 날개로 날아온 우리 현대사 | 남기고 싶은 두 가지 이야기
· · · · · · (收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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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d: rss 2.0
0 有用 沧池流波 2024-01-15 17:00:31 北京
文笔好,还什么都写,爆料很充足,但同时也体现了自身巨大的ego